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리 요시로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5ND1ikWqF5Q)]}}}|| ||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총리 임기''' || [[이시카와현]] 노미시(구 노미군 네아가리정(町))출신으로, 집안은 에도 시대부터 마을의 촌장을 맡아 왔고, 아버지 모리 시게키와 할아버지 모리 기헤이가 각각 수십년 간 네야가리정 정장을 맡은 지역의 명사 가문이다. 이시카와현은 전쟁의 여파가 거의 닿지 않아 지금도 에도 시대부터의 권력자들이 건재한 곳으로, 모리 가문 역시 그러한 지역 유력자 가문이었다. 모리 요시로는 1960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산케이 신문]]에 입사하여 유력 정치인들과 교분을 쌓았다. 그러다 1962년 신문사에서 퇴사하고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이마마츠 지로 중의원 의원의 비서로 근무하다가 1969년 고향 이시카와에서 가문의 이름과 강력한 지반을 바탕으로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1975년 총리부 총무부장관에 취임하여 처음으로 관계에 진출하였다. 이후 1983년 제2차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역임하고 [* 1988년 재입각이 가까웠으나, [[리크루트 사건]]으로 잠시 멀어진다.] 1992년 [[미야자와 기이치]] 개조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에서 건설대신을 역임한다. 자민당에서도 유력 파벌인 [[세이와 정책연구회]](清和会)의 리더를 맡으며[* 자민당의 파벌은 통상적으로 리더의 이름을 따 불린다. 당연히 모리가 회장을 맡았을 때는 '모리파'였다.(1998~2006) 2021년 말부터는 [[아베 신조|아베]]파로 불린다.] 당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2000년 4월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급히 총재 보궐선거를 치러 총재가 되고 85대 총리에 취임한다. 오부치는 결국 1달 후인 5월에 사망했다.[* 모리는 상학부고 오부치는 문학부 영문과라 과는 다르지만 같은 [[와세다대학]] 동기다.] 총리에 취임한 후 초반에는 오부치 총리의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표방하며 [[오키나와현]] [[나고시]]에서 개최된 [[주요 7개국 정상회담|G8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오부치 총리의 정부 차원 경기 부양 정책을 유지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으나 이후에는 이렇다 할 정책은 내지 못한 채, 후술할 반복되는 구설수로 지지율만 깎아먹었다. 그렇게 최악의 지지율 속에서 버티고 있던 2001년 2월 9일 발생한 에히메마루 사고[* 일본 [[https://ja.wikipedia.org/wiki/%E6%84%9B%E5%AA%9B%E7%9C%8C%E7%AB%8B%E5%AE%87%E5%92%8C%E5%B3%B6%E6%B0%B4%E7%94%A3%E9%AB%98%E7%AD%89%E5%AD%A6%E6%A0%A1|우와지마 수산고교]]의 어업실습선 에히메마루가 [[하와이]] 인근에서 미국 잠수함과 충돌 후 전복되면서 당시 함선에 탑승했던 35명 중 9명이 완전 실종된 채 사망 처리되고, 생존한 24명 중에도 12명이 중경상을 당한 사고다.] 당시 [[골프]]를 치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도 이에 즉각 대응하지 않고 라운딩을 계속하는 최악의 대처를 보이며 사실상 정권을 지탱할 힘을 잃었다. 결국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가 우려되는 상황에까지 이르자 2001년 4월 26일,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총리직과 자민당 총재직을 넘겨주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2004년엔 개헌 문제를 논의하는 자민당 신헌법 기초위원장을 맡기도 하는등 보수 우익 성향이 강한 인물이지만 이와 별개로 한일의원연맹 일본 측 회장을 역임했던 [[지한파]] 인사 중 한 명으로도 꼽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